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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1 <박쥐>를 이해시켜주실 <친절한 금자씨>계신가요? (2)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이 만들었고, 송강호와 김옥빈의 파격(?) 노출씬이 화제가 되었던 박쥐를 오늘 보고 왔습니다. 사실 마눌님은 엑스맨을 보자고 했었는데, 제가 우겨서 박쥐를 보게 됐습니다. 미리 예매를 하고 간 것이 아니라서 별로 기다리지 않고 표를 구하긴 했는데, 제일 앞자리였습니다. 뜨아.. 두시간 동안 목이 아프게 생겼습니다. 더구나 임신한 마눌님은 더더욱 힘들었을터인데..




암튼, 영화를 보고 난 후, 뭐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아니기 때문에 재미없거나 뭐지? 라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올드보이도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지만, 국제영화제 수상작이었다는 이유로 박찬욱 감독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나 봅니다. 그가 만들면 재밌겠지...

그래서 본 영화가 친절한 금자씨였는데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친절한 금자씨는 스토리라도 있었는데, 박쥐는 도통 무슨 스토리로 전개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신하균을 죽이고 나서부터 스토리 전개는 현실과 환상이 어디까지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신하균이 죽었다는거야 아님 살아있다는거야? 그리고 왜 송강호와 김옥빈이 정사를 하는데 가운데 신하균이 왜 끼어 있는거지? 이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중간중간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웃긴 씬들이 있어서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는 해 주었지만요... 너무 기대를 크게 해서일까요? 지금 박쥐 영화에 대해 생각나는건 단편의 장면들 뿐입니다.

라여사(출처 : 박쥐 공식 웹사이트)



영화에서 저를 제일 처음 웃기게 만든건 송강호의 재미있는 대사도 아닌, 바로 라여사 김해숙 이었습니다. 단발머리 곱게 한 그녀가 등장했을 때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화제가 된 노출씬은 ...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마눌님은 영화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 송강호의 노출씬이라고 하네요 ㅡ,.ㅡ)

저는 사실 스릴러나 액션, 코믹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영화에 대한 결론은 재미있다, 재미없다 딱 4단어 인데요.. 박쥐는 기대보다 "재미없다"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3개만 주어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결혼하고 처음 본 영화 <박쥐>의 허접한 감상평이었습니다.





Posted by 멋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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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금자씨는 아니지만 2009.05.03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찬욱 감독은 원래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어려서 부터 신부가 되려고 했엇대요.
    그의 이런 배경때문인지, 그의 영화들을 지배하고 있는 많은 부분은, 인간의 죄의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의식과, 인간의 욕망(죄), 불완전함, 그리고 구원이 중요한 테마이죠.

    금자씨때도 그런 평이 좀 있었지만, 바로 이 박쥐야 말로 성경을 충실히 따라간 스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경위는 아시죠?
    아담은 이브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수치심을 느껴 몸을 가릴 것을 찾게 되고 숨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에는, 이브가 줘서 먹은거라고 비겁하게 그녀탓을 하기까지 합니다.

    극중 상현도 극의 중반까지는 충실하게 이를 따라갑니다. 영화를 보셨으니 말 안해도 아실테구요.
    님께서 말씀하신, 신하균이 죽었는지 안죽었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부분은
    확실히 죽었고, 신하균은 그들의 환영입니다. 신하균은 물에 빠져 죽는데요
    태주의 환영에서는 온방이 물에 젖어있고, 상현의 환영에서는 그가 들어가서 잠이 들곤하는 관에서 물이 넘쳐나오며 무언가가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물이 상징하는 것은 죄책감입니다. 그들은 깊은 죄책감에 빠져 있는 것이고, 욕망으로 서로를 엮였던 그들은 이제 죄책감으로 하나가 됩니다. 가운데 신하균을 넣고 성관계를 벌이는 것도, 동일한 죄책감을 연결고리로 해서 그들이 하나로 묶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시점이후부터, 상현에게 태주는 더이상 구원자가 아닙니다. 영화초반, 그녀는 그에게 성모마리아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첫관계 후 하얀 시트를 그녀에게 둘러주죠. 원래 그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녀를 구해주고자 했었지만, 사실은, 신부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매개로써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는 성녀처럼 그를 순수한 욕망의 바다로 이끌었죠.
    하지만, 죄책감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녀는 이제 아예 그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그의 어두운 욕망, 바로 그 자신을 의미합니다. 죄책감을 벗어버리려고 그는 그녀를 살해합니다. 하지만, 죄책감을 일깨워주는 나여사의 눈빛을 보는 순간, 죄앞에 홀로 남겨진 두려움에 참을수 없어 곧 그녀를 되살려 다시금 죄책감을 공유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그녀에 대해 잔인해지죠. 극 초반, 그녀를 너무나 섬세하게 살피고 조그만 상처에도 분노했던 그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허벅지에 고문을 가했던 것처럼, 자신의 욕망으로 떨어져나와 실재하는 존재인, 확장된 또하나의 그이기도 한 태주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게 됩니다. 뺨을 치고 벽에 던지고.. 뭐 말안해도 아시죠)

    되살아난 그녀는 죄책감이라는 것에서 얼핏 자유로워진 듯 싶습니다. 애초에 죄책감이 없으면 죄도 없지 않을까요?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이나 궁극적으로 같지 않을까요? 그녀는 죄의식이 없이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하며 순수한 존재이고, 이를 상징하듯 그녀의 공간은 온통 백색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상현은 그녀를 되살렸지만, 말껏 욕망을 펴는 그녀를 보며, 동화되고 싶다는 욕망과 극도의 죄책감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죄책감이 승리합니다. 어떻게보면, 마작모임에 있던 남자들은 상현의 연적이기도 한데(과거 경찰이엇다는 경비반장은 어려서부터 태주를 성추행한 듯 보이고, 코밑에 점있던 남자는 상현과 만나는 중에도 태주가 관계를 가졌었죠)그녀의 손을 빌려 그들이 처단된 후, 그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포자기의 자살같은 것이 아니고, 사람들앞에 숨고,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의 죄앞에서 떳떳하게 나서는 것이고, 동시에 죄값을 치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로지 복수와 응징의 적의만을 보내던 나여사의 고소해하는 눈 앞에서 죄값을 치루며 최후를 맞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누군가를 구원하려했고, 혹은 스스로 무언가에 힘입어 구원받으려했지만, 그 모든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죄를 기꺼이 내보이고 그값을 치루는 순간, 그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 엔딩에 구두가 보이죠. 이 구두는 상현이 극초반, 목적을 잃고 헤매던 태주에게 벗어준 자신의 구두로, 구원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부분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은 죄앞에 솔직하고, 그 죄값을 기꺼이 치루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기독교(가톨릭)에서 인간은 날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수치를 압니다.
    상현은 처음에 치부를 가리려고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았습니다. 이 붕대를 풀 수 있었던 순간은, 잠시나마 욕망에 충실했을 때 뿐이엇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언제나 더한 죄책감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극 말미에, 자신을 추앙하는 사람들앞에 완전히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며 초라하고 더럽고 나약한 자신의 모든것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당당하게 섭니다. 돌팔매질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진 예수와도 같이 자신이 준비한 처형장으로 나아가죠.

    붕대를 감은 상현- 죄 짓고 에덴에서 쫓겨나며 몸을 가리는 아담
    사람들앞에 발가벗은 상현- 이제 숨고자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 변모된 아담, 예수

    감독의 지난 작품들에는 물이 자주 나오는데요, 이 물은 자궁속 양수, 세례 등을 상징하며 주인공이 죄책감을 느낄때마다 등장하는 기제였습니다.
    세례를 통해 새사람으로 나아가듯이, 죄책감(죄의식)으로 인해 상현과 태주는 구원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죄앞에 도피하지 않고 짊어지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죠.

    인간을 인간이게 존재토록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은 욕망일까요, 죄책감일까요?
    감독은 죄책감이 더 근본적인 것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올드보이에서도, 최민식을 파멸로 이끈 남자는 욕망대로 다 이루었지만, 허무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최민식은 죄값을 치루었고, 진실과 마주한 순간, 다른 구원의 길을 향해 나아가죠.
    복수는 나의것에서 송강호는 예정대로 모든 복수가 끝났지만, 그것은 또다른 복수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욕망의 고리라는 악몽속에서 구원을 얻는 길은 더 큰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과정에서 짓는 인간의 죄를 인간스스로 짊어지라는 것이죠.

    감독이 이 영화를 자신이 만든 영화중에 잘 된 영화라고 한 건
    이같은 감독의 인간관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박쥐에서 송강호는 처음부터 예정된 희생양이자 제물이었고, 순수해지는 과정을 통해 제단에 바쳐집니다.
    그의 희생을 보면서, 우리안에 내재된 또다른 아담이나 예수를 이끌어내보기를 감독은 바랬었는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